지난 포스팅에서는 우리가 당연시했던 역사적 통념에 도전하며, 땅과 소유의 문제, 그리고 소프트 파워를 통한 패권의 작동 원리를 심도 있게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도대체 어떤 나라는 선진국이 되고, 왜 어떤 나라는 잘 안되는 걸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더욱 가까이 다가섭니다. 특히 19세기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든 아편전쟁 이후, 약 3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선과 일본이 걸었던 극명하게 엇갈린 길을 추적합니다. 세계사의 거대한 전환점에서 일본은 어떻게 위기를 기회로 삼아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반면, 조선은 왜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좌초하며 결국 식민지라는 비극적 운명을 맞이해야 했을까요?
김태유 교수님은 청나라의 양무운동, 일본의 메이지 유신, 그리고 조선의 갑신정변 시도와 그 이후의 쇄국 정책을 날카롭게 비교 분석하며, 단순한 역사적 사실 나열을 넘어 그 이면에 숨겨진 성공과 실패의 결정적 요인들을 파헤칩니다. "양이의 함포는 우리보다 사거리가 세 배 멀다"는 냉혹한 현실 앞에서 각국 지도층은 어떤 판단을 내렸으며, 그 과학적 이성과 감성적 정서의 차이가 국가의 명운을 어떻게 갈랐을까요?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과거의 이야기가 놀랍도록 현재 우리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교수님은 지금 우리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두 번째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으며, 과거 조선이 저질렀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준엄하게 묻습니다.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한 미국의 과학기술 우선주의적 대응과 그 결과(실리콘밸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요? 이공계가 천시되고 핵심 기술 분야의 인재들이 떠나가는 현실, 정치적 담론에 매몰되어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는 모습은 과연 과거의 실패와 얼마나 다를까요?
출처:https://www.youtube.com/watch?v=w6ShyuCqAGA
아편전쟁: 동아시아 운명을 가른 분기점
김태유 교수님은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갈린 결정적 기점을 중국의 아편전쟁으로 꼽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수출하며 막대한 무역 흑자를 기록했고, 서양은 '은의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심각한 무역 적자에 시달렸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이 아편을 밀수출하면서 아편전쟁(1840-1842)이 발발했습니다.
세계 중심 국가였던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영국에 처참히 패배합니다. 이는 철선 증기 군함과 신식 소총(플린트락 방식의 '브라운 베스')을 앞세운 영국군과 목선 범선과 화승총으로 맞선 청나라 군 사이의 압도적인 무기 격차 때문이었습니다. 청나라는 사상자 2만여 명, 영국은 500여 명이라는 결과는 당시 동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습니다.
엇갈린 대응: 양무운동, 메이지 유신, 그리고 조선의 쇄국
아편전쟁 패배 후, 청나라는 서양 무기의 우수성을 절감하고 1861년 '양무운동'을 시작, 서양 기술 도입에 나섭니다. 7년 뒤인 1868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고, 다시 16년 뒤인 1884년 조선에서는 '갑신정변'이 시도됩니다. 세 나라 모두 서양 문물을 배우자는 운동이었지만, 그 방향과 결과는 판이했습니다.
- 청나라의 양무운동 (중체서용, 中體西用): '중국의 몸체에 서양의 쓰임'을 접목하려 했습니다. 즉, 청나라의 전통적인 정치 체제와 제도는 유지한 채 서양의 군사 기술과 산업 기술만을 받아들이려 한 것입니다. 이는 전체적인 변화 중 약 30% 정도만 수용하려는 태도로, 군벌별로 각기 다른 나라의 무기를 수입하는 등 비효율을 초래했습니다.
- 일본의 메이지 유신 (화혼양재, 和魂洋才): '일본의 혼에 서양의 재능'을 합치려 했습니다. 이는 '혼'만 남기고 정치, 사회, 문화, 기술 등 모든 것을 서양식으로 바꾸려는 전면적인 개혁이었습니다.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는 등 외형적인 변화는 물론, 국가 시스템 자체를 서구화하려 했으며, 심지어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자는 논의까지 있었습니다.
- 조선의 갑신정변 (동도서기, 東道西器 시도와 좌절): '동양의 도에 서양의 기술'을 결합하려 했습니다. 이는 기존의 것을 98% 유지하고 서양 기술을 2% 정도만 도입하려는, 가장 소극적인 태도였습니다. 그나마도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며 조선의 개화파는 몰락했고, 이후 위정척사(衛正斥邪, 주자학적 정통을 지키고 서양의 사악함을 배척) 사상이 더욱 강화되며 쇄국의 길을 걷습니다.
결국 청일전쟁(1894-1895)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양무운동의 한계와 메이지 유신의 성공이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중국은 이후 변법자강운동(제도 개혁 시도)마저 서태후 등 보수파에 의해 좌절되며 산업 혁명의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충격에 대한 상반된 반응: 일본의 위기의식과 조선의 현실 안주
이러한 태도 차이는 서양 세력과의 직접적인 충돌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 일본의 경우: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을 이끌고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며 함포 시범을 보이자, 일본은 "양이의 함포는 우리보다 사거리가 세 배 멀다. 이대로면 우리는 앉아서 죽는다"는 엄청난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요시다 쇼인과 같은 선각자들은 '대양이(大攘夷, 서양 기술을 배워 서양 오랑캐를 제압)'를 외치며 서양 기술의 전면적인 도입과 국가 시스템 개혁을 주장했습니다.
- 조선의 경우: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로즈 제독의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자, 양헌수 장군은 호랑이 포수들을 동원해 프랑스군을 격퇴했습니다. 당시 양헌수 장군의 보고에도 "우리 총은 100보를 나가는데, 양이의 총은 500보를 나간다"며 무기 격차를 언급했음에도 불구하고, 흥선대원군은 이를 정치적 승리로 포장하고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양이와 화친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신미양요 때도 미군에 큰 피해를 입었으나 물러가게 했다는 이유로 승리했다고 주장)
김 교수는 이러한 상반된 결과가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이성적·과학적 판단을 했느냐, 아니면 과거의 정서에 의존한 감성적 판단을 했느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합니다. 일본은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전면적인 변화를 택한 반면, 조선은 현실을 외면하고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서양 산업 혁명의 위력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과학 기술을 폄하한 결과였습니다.
스푸트니크 쇼크와 미국의 대응: 과학기술 우선주의의 힘
이러한 과학기술 우선주의와 위기 대응의 중요성은 미국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1957년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하자 미국은 엄청난 충격(스푸트니크 쇼크)에 빠졌습니다. 이에 케네디 대통령은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며 10년 내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1969년 달 착륙에 성공합니다.
달 착륙 자체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은 미미했지만, 이 과정에서 미국은 스템(STEM: 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Mathematics) 교육을 대대적으로 강화했습니다. 여기서 배출된 수많은 과학기술 인재와 공공 부문에서 개발된 기술들이 바로 실리콘 밸리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휴렛팩커드(HP)를 시작으로 수많은 첨단 기업들이 국가가 마련한 기술 기반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초기 기술 발전과 산업 형성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과 투자가 필수적임을 보여줍니다.
산업 혁명 성공의 조건: 정부 주도와 적절한 경쟁 유도
김 교수는 1차 산업 혁명의 시작은 민간 주도였을지라도 완성은 정부(의회의 특허법 개정 등)의 역할이 컸으며, 그 이후의 모든 산업 혁명은 정부 주도로 시작해서 정부 주도로 끝난 경우만이 성공했다고 강조합니다. 이미 기술과 자본에서 앞서나간 선진국을 후발주자가 자유시장 경쟁만으로 따라잡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정부 지원은 '언제까지, 어떻게' 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마치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처럼, 초기에는 필수적이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끊고 스스로 경쟁하며 성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너무 이른 지원 중단은 성장의 실패로, 너무 오랜 지원은 경쟁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한국의 한강의 기적은 이러한 정부 지원과 기업 간 치열한 경쟁 유도의 절묘한 조화 덕분에 가능했다고 평가합니다. (이 부분은 추후 한국 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
일본의 부활과 '불사조 효과'
일본은 '화혼양재' 정신으로 산업 혁명에 성공하고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제국주의로 나아갔으나,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일본은 다시 한번 근대 산업 국가로 화려하게 부활하는데, 이를 요시다 시게루 당시 수상은 '신이 일본에 내린 선물(가미카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시 막대한 군수물자가 필요했지만 미국 본토에서 조달하기엔 너무 멀었고, 한국 내 생산 기반은 전무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패전했지만 이미 산업 기술 기반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약간의 지원만으로도 일본의 엔지니어와 기업가들은 폭탄과 군수 장비를 생산해낼 수 있었습니다. 즉, 메이지 유신 이래 축적된 산업 역량, 즉 '준비된 기술'이 있었기에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통해 '불사조 효과'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첫 단추의 중요성: 두 번째 대분기 앞에 선 대한민국
결국 조선과 일본의 역사는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산업 혁명이라는 첫 번째 대분기(Great Divergence)에서 조선은 위정척사로 첫 단추를 잘못 끼웠고, 그 결과는 식민지 전락과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습니다. 반면 일본은 성공적인 개혁을 통해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김 교수는 지금 우리가 4차 산업 혁명이라는 '두 번째 대분기'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합니다. 정보를 이용하고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이 지식산업 혁명기에, 우리가 또다시 첫 단추를 잘못 끼우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우려합니다. 과거 '산농공상(士農工商)'의 잔재로 여전히 이공계가 천시되고, 정치 공학이라는 용어에서 보듯 공학(엔지니어링)이 왜곡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스템(STEM)에 인문학적 소양을 더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공학이라는 기본 토대 없이 양념만 중시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대한민국의 우수한 인재들이 의대로만 몰리고, 반도체 특성화 학과가 미달되는 현상은 과거 서양의 함포 앞에서 주자학만 외치던 조선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경고합니다. 당시 정치적 논쟁(동인-서인 갈등)에 매몰되어 국력 강화라는 정책적 과제를 외면했던 것처럼, 지금도 우리 사회가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절체절명의 과제를 우선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과 성장의 딜레마
결국 모든 논의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 행복해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경제 성장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 아니면 일정 수준의 성장을 이룬 지금은 분배와 삶의 질을 우선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토론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시간에 더 깊이 다루기로 하며 이번 논의를 마무리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 우리 미래를 결정짓는 두 번째 기회이자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 기회를 잡기 위한 올바른 판단과 실천입니다.
유튜브 채널 언더스탠딩에서 진행하고 있는 김태유 교수님의 '더 시빌라이제이션', 네 번째 여정도 깊은 성찰과 함께 마무리합니다. 문명 대전환기, 국가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들이 무엇인지,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엇갈린 길을 통해 생생하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번 네 번째 시리즈에서 제 마음에 가장 강하게 새겨진 통찰은, 동일한 '객관적 사실' 앞에서 각국 지도자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을 내리는지, 아니면 '과거의 정서에 의존한 감성적 판단'을 내리는지에 따라 얼마나 엄청난 결과의 차이가 벌어지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아편전쟁의 충격파가 동아시아를 강타했을 때, 그리고 서구 열강의 압도적인 기술력을 목도했을 때, 일본은 페리 제독의 흑선 앞에서 현실을 냉철하게 인식하고 "이대로면 앉아서 죽는다"는 위기의식 아래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전면적 개혁의 길을 택했습니다. 반면 조선은, 양헌수 장군의 보고에서조차 "양이의 총은 500보를 나간다"며 무기 격차라는 객관적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애써 정치적 승리로 포장하며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쇄국의 문을 더욱 굳게 닫아걸었죠.
결국 이 '판단의 차이'가 첫 번째 '대분기(Great Divergence)'에서 두 나라의 운명을 극명하게 갈라놓았다는 교수님의 분석은, 오늘날 '두 번째 대분기'를 맞이한 우리에게도 너무나 뼈아픈 교훈을 던져줍니다.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감정이나 과거의 영광에 기댄 판단이 아닌,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냉철하고 과학적인 분석과 결단이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것을 역사는 명확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리더십의 무게와 책임감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행복과 성장의 딜레마'라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중요한 화두로 논의가 이어진다고 하니, 그때까지 오늘의 여운을 곱씹어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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