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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대한민국/김태유 교수님의 '문명사 이야기'

[언더스탠딩] 김태유 '위대한 문명사' 시리즈 정주행: 문명사적 해법을 듣다 -(1)

by 자꿈두(FDiD) 2025.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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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숨 가쁘게 달려온 대한민국의 성장 신화 뒤로, 우리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고 엄중한 현실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힘이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숙명, 전 세계를 휩쓰는 디글로벌라이제이션의 거센 파고, 그리고 국가의 지속 가능성마저 위협하는 저출산과 저성장의 늪은 우리의 현재이자 미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마치 사방이 안개에 휩싸인 듯,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시기입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순간, 유튜브 채널 '언더스탠딩'에서 방영된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님의 'The Civilization 위대한 문명사' 시리즈는 마치 등대처럼 다가왔습니다. 수천 년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문명의 흥망성쇠,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번영을 일구어냈는지에 대한 교수님의 깊이 있는 통찰과 명쾌한 분석은 당면한 대한민국의 과제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날카로운 진단과 미래를 향한 묵직한 제언들은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깊은 공감과 함께 숙고의 시간을 갖게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위태로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국민 개개인의 현명한 판단과 시대적 과제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절실합니다. 우리가 어떤 지도자를 선택하고, 어떤 정책 방향에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명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절박함 또한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 우리에게 더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김태유 교수님의 '위대한 문명사' 강의 내용을 시리즈로 정성껏 정리하고, 여기에 저의 미력한 생각과 고민을 덧붙여 블로그에 공유하고자 합니다. 과거 문명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다시 한번 도약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tEDGyGuv6k4&list=PL142diDwvogaLJhMhLkah3fLChoTztsk7&index=1


자원 공학도에서 문명사학자로

김태유 교수님은 원래 자원 공학을 전공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문명사와 강대국의 원리를 연구하는 학자가 되셨을까요? 교수님은 어릴 적 역사 소설을 즐겨 읽으며 역사학자가 되려 했습니다. 삼국지, 수호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사마천의 사기, 로마사 등을 읽으며 역사 속 위인들처럼 사회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의 아버님은 공과대학 진학을 강력히 권유하셨습니다. 당시 교수님은 역사학과가 훨씬 재미있을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아버님은 8시를 가리키는 시계를 보여주시며 "시계 바늘은 눈에 보이는 것일 뿐, 진짜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그 뒤의 태엽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덕분이다. 너는 시계 바늘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 아니면 시계 태엽 같은 사람이 되고 싶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교수님은 더 이상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공학이 세상을 움직이는 '태엽'이며, 문과는 '광대'처럼 그 위에서 노는 것뿐이라는 논리로 교수님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교수님은 공과대학에 진학했고, 이후에도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이공계 진학을 권유했습니다.

 

우리나라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화된 지 오래지만, 70년대 초반에는 서울공대가 서울 상대나 서울 의대보다 입학이 훨씬 어려웠습니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졌죠. 당시 이공계로 진학했던 인재들이 지금의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한국 경제 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진로 선택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교수님의 아버님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토목 공학을 전공한 분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아들이 역사 소설에 빠져 역사학자가 되겠다고 하자 매우 안타까워하셨다고 합니다.

 

공학을 공부하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알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고달프고 힘든 길일 수 있습니다. 역사 소설을 읽으며 편하게 공부하는 사람이나 힘든 공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나 월급은 비슷하니 말입니다. 이공계를 기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는 이공계 출신들이 사회적 대우가 좋았고 월급도 많았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KIST를 설립하여 서울대 교수 연봉의 약 세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제공하며 이공계 인재들을 적극 유치했습니다. 당시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들이 서울대보다 KIST를 선호할 정도였습니다.

 

교수님은 앞으로 스타트업과 벤처가 성공하고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인공지능(AI)이나 휴먼 로봇 등이 등장하며 다시 한번 이공계와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르네상스가 올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지난 20~30년간 공학 분야의 발전과 혁신이 다소 더딘 시기였다면, 이제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다가올 것이라는 예측입니다.

 

과거 이공계가 사회적으로 덜 존경받고 기피 대상이 되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뛰어난 공을 세운 엘리트 관료들이 대부분 사회과학계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섬유 산업 과장은 섬유에 대해 몰랐고, 자동차 산업 과장은 기계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전자 산업 과장도 전기도 전자도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성공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한국은 모방 경제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산업부나 과기부의 주무 과장들이 가장 먼저 하던 일은 일본으로 출장을 가서 일본의 성공 사례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따라 하면 성공 확률이 매우 높았죠. 교수님은 과거 ROTC 장교 시절, 지뢰를 가르치면서 "지뢰밭에 들어가거든 지뢰를 잊어버려라. 앞사람의 군홧자국만 밟고 가면 100% 산다"고 가르쳤던 일화를 소개하며, 이것이 바로 모방 경제 시대에 성공하는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뢰밭 중간쯤 왔는데 앞사람의 군홧자국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지뢰의 간격, 매설 각도 등을 정확히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즉, 공학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가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앞사람 발자국만 밟으면 됐기에 이공계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공학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문과로의 전향, 그리고 다시 이과로

교수님은 공과대학에 다니면서 학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역사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젊은 시절 오일 쇼크가 터졌습니다. 당시 오일 쇼크는 IMF 외환 위기보다 훨씬 심각하여 서울 시내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았고, 경찰이 불 꺼지지 않은 집의 소등을 지시하며 학교와 공장은 수업과 조업을 단축했습니다. 테헤란로라는 이름도 이란과의 석유 확보를 위해 지어졌을 정도였습니다. 교수님은 이때 세상에 태어나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석유 위기를 해결하는 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는 미국과 영국 108개 대학에 편지를 써서, 국민 소득 1,000달러 수준에 인구 밀도가 높고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에서 석유 위기를 해결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을 전했습니다. 34통의 답장이 왔지만 대부분 "좋은 생각인데 미안하다, 행운을 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콜로라도 스쿨 오브 마인즈라는 명문 광산 대학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자원 관련 공부를 하려 했지만,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 캐는 법만 알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딜레마에 부딪혔습니다. 당시 자원 경제 분야에는 공학을 깊이 공부하는 전공과 경제학을 깊이 공부하는 전공이 있었는데, 교수님은 이때 경제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됩니다.

 

교수님은 영국 석탄을 연구하다 보니 영국 산업 혁명을 공부하게 되었고, 미국 석유를 연구하다 보니 미국 2차 산업 혁명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1차 산업 혁명이 석탄, 야금, 직물 혁명이었다면, 2차 산업 혁명은 전기, 화학, 강철 혁명으로 석유가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이후 전력이나 원자력 같은 미래 첨단 에너지 연구를 통해 자연스럽게 4차 산업 혁명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자원 공학과에서 에너지 경제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산업 공학과로 옮겨 산업 혁명과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공대 진학이 시간 낭비였다고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학부부터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자신은 대학원에서 전공을 바꿔 더 많은 과목을 수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국가 발전 원리를 연구하고 이를 문명사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과학 기술과 자연의 법칙에 대한 이해가 인문 사회학자들에게는 없는 비교 우위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산업 혁명의 증기 기관에 대해 이름만 알 뿐, 그 공학적 원리와 고민은 잘 모릅니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 기관을 발명한 것이 아니라, 뉴커먼이라는 사람이 만든 효율이 낮은 증기 기관을 와트가 개량하여 효율을 높인 것이 산업 혁명을 촉발한 핵심이라는 것을 교수님은 강조합니다. 즉, 산업 혁명의 시작은 석탄이라는 에너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청와대 정책 보좌관, 그리고 '개혁'의 좌절

참여정부 시절, 김태유 교수님은 청와대에서 정보과학기술 보좌관으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연구해 온 4차 산업 혁명을 이룰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4차 산업 혁명'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기에, 그는 '과학 기술 중심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산업 혁명인 한국의 한강의 기적이 왜 성공했는지 분석했습니다. 한강의 기적은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산업 혁명으로, 앞선 국가들의 발자국을 따라갔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한강의 기적의 장점을 4차 산업 혁명에 접목하고, 동시에 한강의 기적 이후 경제 성장률이 하락한 문제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교수님은 과거 한강의 기적 당시 경제기획원재무부가 각각 미래를 기획하는 일과 현재의 급한 일을 담당하며 성공적으로 국가를 운영했음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1994년 이 두 부처가 기획재정부로 합쳐지면서 한국의 경제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공무원들은 빨리 성과가 나는 일을 해야 승진할 수 있기에 '급한 일'을 우선 처리하고 '중요한 일'은 자꾸 뒤로 미루게 됩니다. 정치인 또한 임기 내 성과를 내야 하기에 장기적인 관점의 '중요한 일'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은 4차 산업 혁명 성공을 위해 '중요한 일'을 책임지고 전담하는 독립된 부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모델처럼, '중요한 일'을 담당하는 과학기술부와 '급한 일'을 담당하는 기획재정부를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을 설득하여 과학기술부 장관을 과학기술 부총리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청와대에서 이룬 첫 번째 큰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처를 만들고 부총리를 임명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산이 있어야 했습니다. 교수님은 과학 기술 예산만큼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과학 기술자들에게 통째로 넘겨달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부처의 예산은 세부적으로 나눠줄 수 있지만, 20~30년 후의 기술을 문과 출신 사무관이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예산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대한민국 예산 행정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설득 끝에 예산을 받아내 과학기술부 내에 '기술 혁신 본부'라는 작은 예산실을 만들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았습니다. 일을 추진할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교수님은 이공계 공직 진출을 강력히 추진했습니다. 당시 산업부 국장 중 이공계 출신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공계 출신들을 대거 승진시키고, 심지어 이공계 박사 50명을 특별 채용하여 공무원으로 전진 배치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이로 인해 고시촌에서는 데모가 일어났고, 행정자치부에서는 대한민국의 관료 제도를 흔드는 엄청난 사건이라며 반발했습니다. 돈을 가진 재경부와 조직을 장악한 행정자치부의 '공적 1호'가 된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러한 개혁에 가장 극렬하게 반대하고 무산시키려 노력했던 부처는 바로 과학기술부였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과학기술부가 전폭적으로 지원해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과학기술부 부총리가 생기고 예산과 권한이 커지면 기획재정부 출신들이 과기부 요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길 것이라 우려했습니다. 또한, 'R&D 카르텔'처럼 자신들이 굴림하며 좌지우지하던 연구 개발 예산에 대한 영향력을 잃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교수님은 이러한 기득권의 저항에 직면하며, 자신이 공직 사회의 생리를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교수님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고, 그가 청와대를 떠난 후 과학기술부 부총리 직위는 다시 과기부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가장 환호한 것은 과기부 공무원들이었을 것입니다.


깨달음과 '문명 이론'의 완성

돌이켜보면, 교수님은 앞으로 유사한 개혁을 시도하려는 후임자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차라리 아예 새로운 부처를 신설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교육부가 잘되려면 교육부가 없어져야 한다는 냉소적인 말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교수님은 과기부의 난을 겪은 후 "과기부가 없었으면 4차 산업 혁명은 성공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지금 다시 시도하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중요한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할 시간과 준비가 부족했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한 사람들을 원망하고 분노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라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느 날 새벽 3시, 분노에 휩싸여 잠에서 깬 그는 조선 시대 조광조 선생과 율곡 이이 선생의 일화를 떠올렸습니다. 율곡 선생은 조광조 선생을 "학문이 완성되기 전에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했다"고 평가했는데, 당시에는 율곡 선생이 건방지다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너 김태유도 학문도 완성되지 않으면서 뭘 하겠다고 했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교수님은 남은 인생을 *국가 발전 원리'를 완성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했습니다. 20년 넘게 연구에 몰두하여 8권의 책을 저술했습니다. 이코노믹 그로스, 패권의 비밀, 한국의 시간 등이 그 결과물입니다. 그는 "명검을 만들어서 세상을 평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명검을 만들어서 세상을 평정한 무사에게 이를 바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연구에 임했습니다.

 

그는 모든 저녁 약속, 술자리, 인간관계를 단절하고 매일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먹으며 연구에 매진했습니다. 마치 산속 암자로 들어가 공부하는 것처럼 몰두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 이유가 자신의 설명 방식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서울대 대학원에서는 자신이 하는 말을 이해 못 하면 학생 책임이었지만, 사회에서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설명이 왜 어려운지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그는 과학 기술과 경제 이론이라는 복잡한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론들은 기본 공부가 되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이 좋아하고 설득력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는 '역사'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역사는 누구나 흥미를 느끼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50대 중반에 미국 유학을 다시 떠나 산업 혁명사를 공부하려 했지만, 적절한 역사학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 역사학자 4명에게 8년 동안 사사를 받으며 역사를 배웠습니다. 일요일 아침 7시에 만나 일주일 동안 읽을 챕터와 논문을 정하고, 3시간 동안 집중 토론을 했습니다. '패권의 비밀'을 공동 저술한 김대륜 교수도 그중 한 분으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국사를 전공한 분입니다. 그는 교수님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야사나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수님은 자신을 '문명사학자'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문명'의 재정의: 산업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진짜 문명

일반적으로 문명은 인간 사회가 물질적, 정신적으로 진보된 상태를 의미하며, 농업 혁명으로 국가 체제가 갖춰진 시점을 문명 사회의 시작으로 봅니다. 그 이전의 수렵 채집 사회는 미개와 야만으로 불립니다.

 

하지만 김태유 교수님은 이러한 정의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농업 사회를 문명 사회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농업 사회의 일반 서민 대중은 수렵 채집 사회보다 더 못 살았기 때문입니다. 맬서스의 인구론처럼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모든 사람이 겨우 생존하는 헐벗고 굶주린 상태에 놓였습니다. 또한, 농사를 지어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자가 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농업 사회에서 부자는 권력을 이용해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고리대금과 같은 방식으로 부를 축적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로빈 후드나 홍길동처럼 부자의 돈을 훔치는 사람이 '의적'으로 칭송받기도 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농업 사회 인류의 뼈 골밀도나 건강 상태는 원시 수렵 사회에 비해 훨씬 좋지 않았고, 평균 수명도 30대 초반에 불과했습니다. 육식 비중이 10% 이하로 떨어지고 몇몇 곡물만 섭취하면서 영양 불균형이 심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농업 사회의 격언인 "일해라", "청빈하게 살아라"나, "죽어서 천당에 가라"는 종교적 가르침은 지배자들이 노동 계층을 수탈하는 통치 이론에 불과하다고 교수님은 지적합니다. 살아생전 천당에 갈 수 없는 세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8천 년의 농업 사회를 산업 혁명에 의해 진정한 문명 사회가 올 수 있는 과도기였다고 평가합니다.

 

산업 혁명 이후 유아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들고, 평균 수명이 80세까지 늘어나며, 키도 많이 커지는 등 인류의 삶이 질적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원시 수렵 사회의 영양 상태가 다시 복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농업 사회에서는 부자가 되기 위해 타인을 착취해야 했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생각하여 물건을 많이 만들면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규모의 경제, 기술의 경제로 인해 노력할수록 더 큰 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교수님은 산업 혁명 이후가 진정한 문명 사회의 시작이며,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 혁명(지식 산업 사회)은 문명 사회의 극치를 보여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만약 그가 아버님의 강요로 공과대학에 가지 않았다면 이러한 문명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이며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김태유 교수님의 특별한 이력과 학문적 여정, 그리고 그 바탕이 된 문제의식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자원공학도에서 문명사학자로, 그리고 국가 정책의 중심에서 개혁을 시도했던 교수님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 같았는데요.

이번 글은 시리즈의 첫 번째 편으로, 김태유 교수님이라는 인물과 그의 거대한 학문적 배경을 소개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교수님이 제시하는 국가 발전 원리와 미래 사회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 편부터 더욱 심도 있게 다룰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기대를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감명 깊게 다가왔던 부분은 바로 '문명 사회'의 시작점에 대한 교수님의 통찰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농업 혁명으로 국가 체제가 갖춰진 시점을 문명 사회의 시작으로 배워왔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이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시죠.

 

"과연 농업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문명 사회였을까?"

 

교수님의 주장에 따르면, 농업 사회의 일반 서민 대중은 오히려 수렵 채집 사회보다 더 열악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순 명료합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만,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맬서스의 덫'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개인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자가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고, 부를 축적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통해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고리대금과 같은 착취적인 방식뿐이었다는 분석은 서늘한 현실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소수의 지배층을 넘어 모든 인류의 삶이 질적으로 향상되기 시작한 산업 혁명 이후가 비로소 '진정한 문명 사회'의 시작이라는 교수님의 주장에 깊은 공감을 표하게 됩니다. 기술의 발전이 어떻게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정의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이러한 문명사적 이해를 바탕으로 김태유 교수님이 제시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과제와 대한민국의 미래 전략에 대해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펼쳐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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