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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대한민국/김태유 교수님의 '문명사 이야기'

[언더스탠딩] 김태유 '위대한 문명사' 시리즈 정주행: 땅, 패권, 소프트파워의 문명사적 통찰 -(3)

by 자꿈두(FDiD) 2025.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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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포스팅에서는 김태유 교수님이 정의하는 '문명사'의 깊이 있는 개념과, 산업혁명이 단순한 기술 발전을 넘어 어떻게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강대국들의 '불편한 진실'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문명의 거대한 톱니바퀴가 어떻게 맞물려 돌아가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여정이었습니다.

 

이번 세 번째 시간에는 한층 더 도발적이고 근원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는 '중국'이라는 명칭은 과연 역사적 실체에 부합하는 것일까요? 유목 민족은 정말 기록된 역사처럼 일방적인 약탈자였을까요? 김태유 교수님은 이러한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자체를 뒤흔듭니다.

 

나아가 이번 강의는 인류 문명 발전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였던 '땅'의 문제를 파고듭니다.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던 시애틀 추장의 이야기에서부터, 공유지를 사유화하며 생산성을 극대화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농민을 도시 빈민으로 내몰았던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까지. 문명 발전 과정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불편한 진실'을 통해 우리는 현대 사회의 부동산 문제와 저출산 문제의 뿌리까지 되짚어 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또한, 영국이 어떻게 작은 섬나라에서 출발하여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하고, 나아가 축구와 영어처럼 그들의 문화를 전 세계로 확산시킬 수 있었는지, 그 강력한 '소프트 파워'의 실체를 분석합니다. 과거 로마나 몽골 제국의 물리적인 '하드 파워'와는 다른, 보이지 않는 힘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현대 패권국의 작동 원리는 무엇일까요? 코카콜라와 맥도날드 깃발이 전 세계에 꽂힌 현상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번 글에서도 김태유 교수님의 명쾌한 논리와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세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꿰뚫는 지혜를 함께 탐구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역사의 이면으로 함께 떠나보시죠.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rjoVMBKNADg


산업 혁명 이후가 진정한 문명 사회

지난 에피소드에서는 산업 사회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습니다. 산업 사회 이전에는 인류가 먹고살기조차 힘들었던, 진정한 문명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산업 혁명으로 생산성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파이가 커지면서 비로소 문명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교수님의 주장이었죠.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농업 혁명으로 시작된 고대 4대 문명보다 산업 혁명 이후를 더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그 시점부터가 진짜 문명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일반적으로 농업 혁명 이후를 문명 사회로, 그 이전 수렵 채집 사회를 미개와 야만의 시대로 봅니다. 그러나 농업 사회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당시 사람들은 실제로는 더 궁핍하게 살았습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농업 생산은 체감(점점 줄어듦)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옥한 땅부터 경작하다 점점 더 나쁜 땅으로 갈 수밖에 없어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맬서스의 인구론처럼 식량 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늘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늘 굶주림에 허덕이는 한계 상황에 놓였습니다.

 

더 큰 문제는, 농민들이 자신과 가족을 먹여 살릴 만큼만 생산하고 그 이상은 힘들어 잉여 생산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세금이 걷히지 않아 유지가 어려웠고, 결국 농민들에게 강제로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하여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이처럼 농업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관계가 구조적으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문명이라고 정의한다면, 농업 사회는 오히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퇴행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재에도 남아있는 '열심히 일하라', '과소비하지 마라' 같은 잔재들은 우리 미래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과거가 아름답게 미화되고 현실에 대한 불만이 많아질수록 이러한 경향은 심화됩니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농업 혁명을 '역사상 최대 사기극'이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맥락입니다. 농업 사회에서는 일을 하면 할수록 수확량이 줄어드는 감속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가속과 감속의 원리: 동서양의 통찰

그렇다면 농업 사회는 과연 가속의 원리를 몰랐을까요? 로마 시대의 선각자 카토는 사람들이 잘 사는 방법을 묻자 목축을 권했습니다. 목축 동물의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가속의 원리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농사에 대해서는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하며, 농업이 주는 생산성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고리대금을 살인만큼 나쁘게 본 것도 고리대금이 돈을 복리로 늘리는 가속의 원리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카토는 가속과 감속의 원리를 완벽히 파악한 로마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동양에도 유사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여불위는 상인으로서 막대한 부를 쌓았고, 진시황의 실제 아버지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평생 농사를 지으면 10배, 장사를 하면 100배를 벌 수 있다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세우면 얼마나 벌 수 있는지 묻자 "헤아릴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여불위는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왕손을 진나라의 왕으로 만들고, 자신의 애첩을 시집보내 진시황을 낳게 합니다. 이는 동서양에 걸쳐 기하급수적으로 부를 늘리는 '복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선각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개인이든 기업이든 국가든 잘 살게 되려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썸씽'이 필요합니다. 인구 증가 속도보다 생산량을 더 빨리 늘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공은 바로 산업 사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질소 비료가 개발되면서 식량 증산 속도가 인구 증가 속도를 앞질러 맬서스의 덫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제조업 혁명과 문명 사회의 탄생

농업 사회에서는 생산성을 늘릴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모택동이 중국에서 실시했던 '심경 밀식' 운동처럼, 논에 벼를 빽빽하게 심어 생산량을 늘리려 했으나 오히려 벼들이 키 크기 경쟁만 하다 알곡을 제대로 맺지 못해 수많은 아사자를 냈습니다. 이는 농업 생산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비과학적인 노력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결국 우리가 잘 살기 위한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산업 혁명과 같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 생산을 늘리는 것입니다. 산업 혁명은 8천 년 만에 인류가 이뤄낸 획기적인 발전입니다. 비료 개발로 농업 노동력이 줄어들자, 사람들은 다른 분야를 연구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에서 시작된 1차 산업 혁명은 제임스 와트가 기존의 투박한 증기 기관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체계적인 준비보다는 현장에서의 시행착오와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 우연 뒤에는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의회의 특허권 연장과 같은 필연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이 1차 산업 혁명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공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현장에 투입한 것이 바로 미국과 독일에서 일어난 2차 산업 혁명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연장선상에 있는 풍요로운 산업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산업 혁명은 그전에 존재하지 않던 제조업이라는 새로운 산업을 창조한 위대한 혁명입니다. 수공업 시대와는 달리, 기계를 통해 석탄이나 석유의 동력을 이용하여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창조한 것입니다. 인간이 먹고사는 새로운 방법이 나타난 것이죠.

 

산업 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민주주의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또한, 농업 사회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였던 전쟁도 줄어들었습니다. 농업 사회는 인구 증가 속도가 식량 생산 속도보다 빨랐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식량 부족에 시달렸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옆 나라의 땅을 빼앗는 '근공(近攻)'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업 사회에서는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전략, 즉 가까운 나라와는 싸우고 먼 나라와는 동맹을 맺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끊임없이 싸웠고, 이는 모두 농업 생산의 한계에서 비롯된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산업 사회에서는 더 이상 전쟁이 필연이 아닙니다. 이처럼 전쟁이 필연이었던 시절(농업 사회)과 필연이 아닌 시절(산업 사회)의 차이가 바로 산업 사회가 농업 사회보다 우월한 문명 사회인 이유입니다.


연안국의 저주: 한국의 지정학적 운명

우리나라는 과거 조선 시대에 침략을 받기만 했을까요? 이는 착각입니다. 우리는 우산국, 탐라국을 정벌했고, 여진족을 정벌하여 6진을 개척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만주 대륙을 호령했습니다. 우리가 침략만 받았다고 오해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조적으로 불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입니다.

 

한국은 섬나라 일본과 대륙 국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연안국입니다. 연안국과 섬나라가 있을 때, 섬나라는 이유 없이 연안국을 침략하게 됩니다. 연안국은 육군에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 하지만, 섬나라는 해군에 100%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섬나라의 해군이 연안국의 해군보다 강하여 끊임없이 침략해 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대부분이 프랑스 영토에서 일어난 것도 영국이 프랑스를 침략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모두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국토가 훨씬 작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은 북방의 여진족 방어를 위해 대부분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축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조선은 평소 군대를 많이 키우는 대신 '재승방략'이라는 예비군 제도를 운용하여 여진족 침략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일본군의 침략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중국과 비교해 보면, 프랑스는 연안국인데 내륙국인 독일은 프랑스보다 작지만,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을 점령하여 힘을 키우면 바로 프랑스로 밀고 내려왔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즉, 내륙국은 자기들끼리 싸우다 승자가 연안국으로 밀고 내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프랑스조차도 작은 섬나라나 내륙국의 침략을 받았는데, 우리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작고 섬나라에 인접한 연안국으로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어릴 적 우리가 조상들이 무능해서 침략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열등의식이 있었지만, 프랑스의 전쟁사를 공부하며 그것이 지정학적 저주 때문이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연안국이라는 지리적 불리함 때문에 끊임없는 침략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왜곡과 진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동북아시아에 한, 중, 일 세 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잘못된 역사적 기록입니다. 일본은 대륙에서 변방 국가로 여겨졌고, 조선 시대에는 유일하게 일본과 국교를 맺었습니다. 대륙에서는 일본을 야만인이 사는 섬으로 생각했습니다.

 

현재 중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소수민족들은 끊임없이 싸웠고, 결국 동북아시아 대륙을 통일한 나라의 다음 목표는 항상 연안국인 한반도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축구 토너먼트로 비유하면 항상 결승까지 간 민족입니다. 한무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도 했고, 수양제의 113만 대군을 물리쳐 수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당태종도 고구려의 양만춘에게 패하고 '다시는 요동을 도모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고려는 몽골 제국과 30년 항몽 전쟁을 벌이며 '불개토풍(不改土風)'의 특별 대우를 받았습니다. 즉, 우리는 약소 민족이 아니라 지정학적 저주 때문에 끊임없이 침략을 받았을 뿐, 역사적으로 매우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우리가 '중국'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역사책을 쓰는 것은 큰 오류입니다.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생기면서 국호가 되었을 뿐, 그전에는 '중원'을 의미했습니다. 한족의 나라는 진, 한, 송, 명 네 왕조뿐이었고, 실제 동북아시아의 위세를 떨치고 세계적인 제국으로 인정받은 것은 몽골족의 원나라나 만주족의 청나라와 같은 이민족 왕조였습니다. 우리가 모든 통일 왕조를 '중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인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우리 땅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미래를 올바르게 쌓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유목 민족이 농경 민족을 약탈했다'는 역사적 기록도 재고해야 합니다. 유목 민족은 계절에 따라 살기 좋은 땅을 찾아 이동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농경 민족이 말뚝을 박고 '내 땅이니 들어오지 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 큰 폭력일 수 있습니다. 기록을 남긴 것은 농경 민족이었기에, 유목 민족의 이야기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미국 오리건주 시애틀의 이름은 원주민 인디언 추장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시애틀 추장이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바람과 강물을 소유할 수 없듯이 땅 또한 소유할 수 없다는 원주민의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땅의 소유권' 문제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부동산 문제, 저출산 문제 등 가장 큰 병폐와 직결됩니다. 시애틀 추장의 편지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소유와 생산성의 역설

물론, 공동 소유지가 생산성을 높이지 못한다는 '공유지의 비극' 개념도 있습니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인클로저 운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공유지에 담장을 쳐서 개인 소유지로 만들자 생산성이 크게 올랐습니다. 농사보다 효율적인 목축업이 발달하면서, 땅에서 농사짓던 농민들은 갈 곳을 잃고 도시 빈민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산업 혁명의 공장 노동자로 공급된 것입니다. 인클로저 운동이 도덕적으로 옳았는지 논하기는 어렵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의 산업 혁명에 기초적인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마음 아픈 역설입니다.

1억 원을 100명에게 골고루 나눠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20억을, 누군가는 50억을, 누군가는 빚을 지게 되면, 50억을 가진 사람이 투자를 하고 새로운 산업을 시도하는 등 뭔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가 바로 유럽 대륙이 아닌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합니다.

 

프랑크 왕국은 자녀들에게 땅을 균등하게 상속했지만, 영국은 장자 상속제를 통해 장남에게 모든 것을 몰아주었습니다. 이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여겨질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대규모 농장이 형성되고 자본이 축적되어 산업 혁명의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장남 외의 다른 자녀들은 성직자가 되거나 해외에 나가 기업을 키우는 등 다른 방식으로 성공을 모색해야 했고, 이는 곧 열심히 일해야 하는 강한 인센티브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장자 상속을 하는 모든 나라에서 산업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영국은 장자 상속, 비옥한 목초지, 인클로저 운동 등 여러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정책이 더해져 산업 혁명이 폭발했습니다.

 

이처럼 선발국인 영국은 산업 혁명에 필요한 여러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서 정책을 통해 성공을 이끌어냈습니다. 반면 후발국은 모든 것을 정책으로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영국은 산업 혁명을 통해 세계 1위 국가가 되었고, 축구, 골프 등 영국에서 시작된 스포츠가 전 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영어가 세계어가 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강하고, 멋있고, 부유한 영국을 동경하고 따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과거 로마 제국이나 스페인 제국은 점령한 지역에만 자신들의 문화를 확산시켰습니다. 그러나 점령하지 않은 지역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농업 사회의 전쟁이 땅을 점령해야 했기에 확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대 산업 사회의 강대국은 남의 땅을 빼앗을 필요가 없습니다. 필요한 원료를 사고, 자국의 상품을 팔도록 허락해 주면 점령하는 것 이상으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자유무역 제국주의라고 부릅니다. 미국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할 때도 전쟁보다는 '통상'을 요구했습니다.

 

선진국이 만든 상품은 후진국 국민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축음기, 설탕과 같은 신기한 제품들은 국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는 강한 경제력과 좋은 상품이 물질적인 풍요를 넘어 사회적인 매력(소프트 파워)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으로 압박하는 '하드 파워'와 달리, 좋은 상품과 문화를 통해 자발적으로 따르게 하는 '소프트 파워'가 현대 패권국의 특징입니다. 로마 제국이나 몽골 제국은 하드 파워는 있었지만 소프트 파워가 없었기에 점령지 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영국이나 미국은 점령하지 않은 나라들도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듭니다.


시장의 무한 확장과 미래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점령한 것은 몽골 제국이나 대영 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오늘날 코카콜라 깃발이나 맥도날드 깃발로 점령한 땅은 훨씬 더 넓습니다. 과거 농업 사회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했지만, 산업 사회는 무역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시장이 다 개척되어 더 이상 확장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다음 강의에서 자세히 다룰 내용입니다. 흑백 TV를 팔다가 시장이 포화되면 컬러 TV를 팔고, 다시 디지털 TV를 팔면 됩니다. 자전거를 팔다가 오토바이를, 그리고 자동차를, 궁극적으로 아이폰과 같은 신기술이 만들어내는 신제품은 시장을 무한히 확장합니다. 아직 우리는 이러한 기하급수적인 생산성 향상을 온전히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인공지능은 1950년대에 등장했지만 오랜 침체기를 겪다가 최근에야 본격적인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인공지능으로 인해 엄청난 직업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산업 혁명의 사회적 변화와 발전 속도는 가속하며, 지식 산업 사회로 갈수록 더 빨라질 것입니다. 기술 기반의 생산성 혁명은 과거 세탁기나 에어컨과 같은 제품들을 쏟아내 문명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정보화 혁명은 우리 세상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변화시킬 것입니다.


이번 시리즈에서는 시대를 초월하여 동서양의 현자들이 이미 '복리(複利)'의 엄청난 힘을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로마의 카토가 농업의 한계를 지적하며 목축을 권하고, 돈이 돈을 버는 고리대금의 가속성을 경계했던 이야기, 그리고 사마천 『사기』 속 여불위가 평범한 농사에서 시작해 장사, 나아가 나라를 세우는 일로 확장될수록 부가 헤아릴 수 없이 불어나는 원리를 꿰뚫어 보았던 일화는 실로 놀라웠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복리의 마법'이 왜 이전 시대에는 널리 발현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교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생산성이 점차 체감할 수밖에 없는 '감속 사회'였던 농업 사회에서는 그토록 강력한 복리의 힘조차 일부 영역에 국한되거나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카토가 목축을 권장했지만, 넓은 땅 없이 대규모 목축으로 복리 효과를 누리긴 어려웠을 테고, 고리대금은 소수의 부를 극대화할 뿐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끌어올리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산업 혁명 이후, 인류가 비로소 '가속 사회'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극적으로 반전됩니다. 기술의 발전과 생산 방식의 혁신은 이제 특정 분야가 아닌 '생산성 그 자체'에서 복리의 효과를 목격하게 만들었습니다. 질소 비료의 발명으로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앞지르고, 제조업의 등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부를 창출하며 사회 전체의 파이를 키워나갔습니다. 이는 마치 오랫동안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 세상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과 같은, 진정한 의미의 문명사적 전환이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세상을 움직이는 근본 원리를 이렇게 역사적 통찰과 연결해 주시는 교수님의 강의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다음 여정에서는 또 어떤 지혜로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오늘도 긴 글 함께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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